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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어떻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가 되었을까?

작성일: 2025.05.27

조회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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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도자료]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전 개최.pdf 923.83 KB

뒤샹(Duchamp, Marcel/1887~1968/프랑스→미국) 에로즈 셀라비(Rrose Selavy)로 분장한 뒤샹(젤라틴 실버 프린트/17.8x13.3cm/

1921년 만 레이 촬영/필라델피아 뮤지엄 소장) 여성 가명을 사용해 작품을 발표했다.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9세인 1917년 <샘(Fountain)>을 발표하며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를 만들었고
‘아이디어로서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며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미술계를 은퇴하고 프랑스 체스 대표를 할 만큼 체스에 몰두했다.
뒤샹은 전 생애 동안 매우 적은 수의 작품만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요셉 보이스(Beuys, Joseph)나
앤디 워홀(Warhol, Andy) 등 현대 미술의 거장들은 그의 철학과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뒤샹은  ‘예술가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1. 예술적 가문과 독학을 통한 자기 형성

예술가 집안
프랑스 노르망디의 부유한 중산층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제들(특히 레몽 뒤샹-비용과 자크 빌롱)이  
예술가였기에 자연스럽게 예술적 흥미를 키울 수 있었다. 
파리 이주와 미술학교
1904년 파리로 이주해 아카데미 줄리앙(Académie Julian)에 입학했다. 이곳은 자유롭고
혁신적인 교육 방식으로 유명했지만, 뒤샹은 이러한 전통적인 미술 교육 방식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독학과 실험
정규 교육보다는 당대 예술 사조(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등)를 탐구하며, 
존의 예술적 규범을 깨는 데 관심을 가졌다. 
폭넓은 독서와 지적 교류
뒤샹은 철학, 과학, 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폭넓게 독서했다. 특
부조리극의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 1873~1907)의 ‘파타피직스(pataphysics, 비논리성,
우연, 상상력, 유머와 풍자를 추구하며 기성 권위와 논리 조롱)’와 같은 전위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한 다다(Dada)의 일원으로  당대 예술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적 자극을 얻었다.
 
2. 전략적 사건화: 논란을 통한 영향력의 확대

다다이즘의 '실천적 파괴자'이자 개념적 프레임 구축
그는 다다이즘의 반(反)예술적 태도와 허무주의적인 관점을 공유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다다 정신의 철학적·실천적 혁신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샘>의 레디메이드 개념이다. 
‘예술의 신성성’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며, 물질성과 제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가시화했다.
그의 작업 전반이 예술계 권력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계산된 도발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이 SNS 시대에 적용해야 할 핵심 전략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샘> 사건의 전말과 영향
1917년, 뒤샹은 뉴욕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이사로 활동했다.
이 협회는 모든 작품을  심사 없이 전시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샘>은 심사위원회에 의해
전시가 거부되었다. 그 이유는 남성용 소변기라는 기성품이었고, ‘R. Mutt’라는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이는 예술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와 예술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역설적으로 이 논란 덕분에 <샘>은 대중과 평론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예술가의 수작업이 아닌
'선택'도 창조가 될 수 있다는패러다임 전환을 유도하며, 아이러니와 유머를 통해
기존 예술 개념을 해체한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이후 <샘>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objet) 활용에 영감을 주었고, 팝 아트(Pop Art) 등 후대의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스와 ‘침묵’의 전략
1920년대 이후 프로 체스 선수로 전향하였는데 체스의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예술 철학과 연결했으며, 1968년 사망 직전에 자신의 체스 게임 기록을 미술 작품으로
등록하려 시도하했다. 또한 이 시기 미술 작품을 비밀리에 제작하기도 했다.  
뒤샹의 묘비명 ‘죽음은 항상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81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샹은 프랑스 루앙(Rouen)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 또한 특유의 아이러니와 유머를 담아, 관습적인 사고방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건 늘 남의 일이지(D'ailleurs, c'est toujours les autres qui meurent)”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 없으며 항상 타인의 죽음만을 경험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3. 미술 시장과 컬렉터 시스템의 활용


미술계 네트워크의 형성

뒤샹은 초기부터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고 이를확산하는 데 도움을 준 인물들의 지원을 받았다. 

초현실주의의 리더인 앙드레 브르통(Breton, André)은 뒤샹을 “예술적 반항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유럽과 미국 미술계에  그를 소개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또한, 월터 아렌스버그(Arensberg, Walter),

캐서린 드라이어(Dreier, Katherine) 등 주요 컬렉터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들은 뒤샹의 작품을

구매하고 전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뒤샹은 큐레이터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전시 방식을 제안하는 등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뒤샹은 자신의 예술 철학을 이론화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을 담은 인터뷰, 초기 스케치, 메모 등이 훗날 작품과

동등한 위상으로 전시되기도  했다(1987년 퐁피두 센터 전시). 이는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작가의 사고 과정과 아이디어까지 전시 영역으로 확장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미국 미술관들의 현대 미술 정립 전략과 역할

뒤샹은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의도보다 시스템 자체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했음에도

이 시스템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1929년 설립 초기부터

뒤샹의 작품을 소장하며 유럽 모더니즘과 다른 미국 미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뒤샹을

다다이즘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월터 아렌스버그와 같은 컬렉터는 대량의 작품을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 기증하며 이 미술관의 핵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레디메이드 복제의 역설

뒤샹은 1964년 밀라노의 슈바르츠 갤러리(Schwarz Gallery)와 협업해 8점의 

<샘> 복제품을 제작했다. 1917년의 원본은 소멸된 후였지만, 복제품들은 오히려 뒤샹의

진품 인증서를 획득하며 미술 시장의 권위 구조를 풍자했다. 뒤샹은 이 한정판 <샘>을 통해

예술품의 희소성과 상품성이라는 모순된 가치를 결합하고, 미술 시장의 논리를 역이용했다.

이 복제품들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 ‘예술가의 예술가’라는 평가는 뒤샹의 작품 수보다 철학적 영향력에 주목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요셉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 이론이나
앤디 워홀의 대량생산 미학에서 어떻게 뒤샹의 사유가 재해석되었는가?
 2. 뒤샹은 미술 시장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활용했는데,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가 그의 예술적 메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3.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오늘날 디지털 아트 및 NFT와 같은 현대적 예술 형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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